강원도여행/속초--양양

낙산사를돌아보니(1)..[8월16일]

美知 2009. 8. 29. 09:26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낙산에 있는 절...[낙산사]
 
낙산사원통보전 /낙산사원통보전,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로서 해변에 위치하며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낙산은 산스크리트의 보타락가(補陀洛伽 Potalaka)에서 유래한 말이며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는 곳을 뜻한다.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 도량의 하나인 낙산사는 671년(문무왕 11)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낙산사 창건 이후 이 절과 관련된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는 원효(元曉), 조신(調信),
사굴산파의 개산조 범일(梵日)의 이야기 등이 전하고 있다. 이 절은 858년 범일에 의해 중건된 후
여러 차례 불타 중건이 거듭되었으나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고 1953년과 1976년에 다시 복구해서
원통보전(圓通寶殿)·종각(鐘閣)·일주문(一柱門)·선당(禪堂)·승당(僧堂)·객실(客室) 등의 건물이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유적은 낙산사동종(보물 제479호), 낙산사7층석탑(보물 제499호),
낙산사홍예문(강원도유형문화재 제33호), 낙산사원장(강원도유형문화재 제34호), 낙산사홍련암(강원도유형문화재 제36호),
양양낙산사사리탑(강원도유형문화재 제75호) 등이 있다. 1977년에 화강암으로 만든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입상(海水觀音立像)이 있으며, 절 앞에는 의상의 전설이 담긴 홍련암 등이 있다.
그러나 2005년 4월 5일 강원도 양양 지역에서 발생한 큰 산불로 낙산사원장·원통보전·일주문·낙산사홍예문 등
주요 전각과 낙산사동종이 소실되고, 낙산사 7층석탑이 일부 손상되었다.(옮긴글)

 

                      낙산사
http://www.naksansa.or.kr/ 

 

              낙산사 입구에서 옮겨보았다.

 

 

 

 

 

              평화롭기만 한 그 곳의 정취가 물씬 생각 나는 ...그냥 가슴이 답답한 어느날 또 다시 가보고 싶다.훌훌~

 

              유유히 노닐고 있는 이 친구는 얼마나 좋을까~

 

              [낙산사보타전] 휴일이라 관광객의 발길이 꽤 많은 듯...

 

 

              [낙산사보타락]

 

 

               아직은 솜씨가 없어서인지 날씨가 좋지않아도 잘 찍었으면 사진이 밝지않았을까? 너무 어둡다.많이 지쳐서

               사진 찍기가 싫을만큼,걷는 것도 싫을만큼 지친 그런 하루이다보니~ 좀 쑥쓰럽기까지...

 

 

              코끼리 문양의 석등이....까닭이 있을텐데 문화해설사를 만날 수없어 이유는 알 수없었다.문화해설사가 몇분이

              계셔서 찾은 이들에게 해설을 해주면 좋을텐데 아쉬운 맘이었다.

 

 

              채우려는 음을 모두 비우고 미워하던 마음도, 가지려했던 욕심도 내려놓으니 마음이 참으로 편하고

              너그러워지는 것은 생각하기에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지 않다.

 

 

              무궁화는 우리꽃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보기가 어려웠는데 이렇게 보니 얼마나 반가운지....

       

             너무도 아름답게 피어있는 연꽃을 나는 오랫동안 지켜보고 서있었다.나는 과연 무엇을 피웠을까~

            순간 눈물이 핑돌았던 그 날  사진으로 옮겨오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나보다. 나를 가끔은 돌아볼 시간이  필요할 때 떠나보는거다.훌쩍~그렇게..

             

 

『화엄경』에는 「보살주처품(普薩住處品)」이 별도로 있어서 금강산에는 법기(法起)보살, 오대산에는 문수보살, 천관산에는 천관(天冠)보살이 상주설법(常住說法)한다고 설하고 있다.

관음주처 신앙은 이 경전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기초하고 있다. 선재동자(善財童子)는 28번째로 선지식(善知識)을 만나는데, 그가 곧 관음이다.

관음보살은 남방 해상의 광명산(光明山), 곧 보타낙가산에서 상주설법하고 있었는데, 선재동자가 묻는 보살도(菩薩道)에 대해 일체 중생들이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서원을 세워 대비법문광명행(大悲法門光明行)을 성취했다고 했다.



보타낙가산은 소백화산(小白花山)으로도 불린다. 『삼국유사』에서는 서역의 보타낙가산이 백의대사(白衣大士), 곧 관음보살이 머무는 곳이므로 '소백화'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의상이 쓴 백화도량(白花道陽)이란 용어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삼국유사』「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조에 전하는 낙산사 창건 연기설화는 다음과 같다.

예전에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서 대비진신(大悲眞身)이 이 해변의 굴 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洛山)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데, 여기서는 소백화(小白華)라고 하고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무는 곳이기에 이를 빌려서 이름한 것이다.




의상은 재계(齋戒)한 지 7일 만에 좌구(座具)를 물 위에 띄웠는데,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시종이 그를 굴 속으로 인도하여 들어가서 참례함에 공중에서 수정염주(水精念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동해룡(東海龍)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서 이에 진용(眞容)을 뵈고, "이 자리위의 꼭대기에 대나무가 쌍(雙)으로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 이에 금당을 짓고 소상(塑像)을 봉안하니, 그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듯했다. 대나무는 다시 없어졌음으로 바로 진신이 거주함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 절을 낙산사라 하고서 법사는 그가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나갔다.

이상은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전하는 낙산사의 창건연기 설화지만, 이보다도 약 50년 전에 기록된 설화도 있다. 곧 13세기 전반에 활동한 석익장(釋益莊)의 「낙산사기(洛山寺記)」가 그것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용되어 있다.

양주(襄州) 동쪽 강선역(降仙驛) 남쪽 동리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쪽 몇 리 쯤의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백 척 가량이고 크기는 곡식 만 섬을 실은 배라도 드나들 만하다. 그 밑에는 항상 바닷물이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멍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관음대사(觀音大士)가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굴 앞의 50보 쯤 되는 바다 가운데에돌이 있고, 돌 위에는 자리 하나를 펼 만한데, 수면에 나왔다 잠겼다 한다.

옛적에 신라 의상대사가 친히 성용(聖容)을 뵙고자 하여 돌 위에서 자리를 펴고 예배했다. 14일이나 정성을 다했지만 볼 수가 없었음으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바다 속의 동해용이 붙들어 돌 위에 올려 놓았다. 대성(大聖)이 굴 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를 주면서, “ 내 몸은 직접 볼 수가 없다. 다만 굴 위의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이 나의이마 위다, 거기에 불전을 짓고 상을 봉안하라.”라고 했다. 용도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쳤다. 법사가 여의주를 받고 그 말과 같이 가서보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 불전을 짓고 용이 준 옥으로 상을 조성해서 봉안하니 바로 이 절이다 ….
세상에 전해오기를 굴 앞에 와서 지성으로 예배를 드리면 파랑새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처럼 두 기록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관음진신이 일러준,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낙산사를 창건했다는 내용만은 일치한다. 따라서 서역의 보타낙가산에 관음진신이 항상 머문다는 설에 따라 동해의 낙산사에도 관음진신이 상주한다는 신앙은 의상대사에 이르러 정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옮겨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