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여행/원주--문막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뜻을 기리기위한 무위당기념관에서

美知 2012. 7. 22. 07:34

         

 

        2012년 7월20일~21일 원주 관광 홍보단과 합류하여 함께 원주를 다시한번 둘러볼 수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살고있는 원주였지만 타고장인 듯 둘러보면서 아름다운 원주를 어떻게 하면

         널리 알릴까 많은 생각을 하였던 투어였다. 원주의 관광발전에 내가 조금이라도 역할을 하기

         위한 다짐을 하면서 이번 원주홍보투어를 포스팅 해봅니다.

       

         나는  원주에 살면서 무위당선생님의 숭고한 정신을

         잘 떠올리지 않았던 점을 부끄러워 하면서 이 글을 올려본다.

 

 

       원주를 다녀가는 길에 이곳 무위당 기념관에 잠시 들러 무위당선생님의

       뜻을 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정 무엇이 옳고 그릇타 할 수없겠지만

       삶의 진정성을 느낄 수있는 곳인 것같다.

               

 

                 [원주시 중앙동 밝은신협 5층에 위치한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 기념관]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의 장일순 선생님

장일순 선생은 1928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1994년 원주시 봉산동 자택에서 67세를 일기로

영면하기까지 서울에서의 유학기간과 5.16 직후 사상범으로 춘천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른 기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고향 땅 원주를 떠난 적이 없었다.

선생은 6.25동란 직후 원주에서 ‘대성학원’을 설립하는 등 교육운동에 헌신하면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이외 어떠한 사상적 개진(開陳)도 허용되지 않던 엄혹한 상황에서 중

립화 평화통일론을 제창하였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출옥 후 선생은 다시 오랫동안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치열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원주 땅이 한때 반독재 투쟁의 핵심적 거점이 되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러니까 생애의 거의 대부분을 원주라는 작은 지방도시의 경계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장일순 선생은 언제나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맥박의 중심에 서 있었고,

그 자리에서 실로 많은 젊은이들에게 직간 접으로 희망과

용기와 영감을 불어넣어 주던 스승이었다.

 

 

'하는 일 없이 온갖 일을 했던 사람'

그러면서도 선생에게 붙여진 공식적 명칭은 늘 서예가였고, 때로는 그저 막연히 사회운동가였다.

생애를 통해서 선생의 일은 언제나 그 자신이나 가족의 이익을 위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회적 행동으로 일관해 있었지만, 그러한 행동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은,

어떤 형태의 일이든 자신의 존재를 앞세우거나 눈에 뜨이게 하는

방식으로는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생은 치열한 반독재 투쟁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와중에서도

늘 배후인물일 뿐이었고, 생애의 후반기에 계급적 대립구도를 넘어

산업문명 자체의 극복을 겨냥하는 생명운동을 제창할 때 에도

그냥 ‘사상적 선배’일 뿐이었다. 항간에서 흔히 “하는 일 없이 온갖 일을 하는 사람”으로

선생을 지칭했던 것도 이런 사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선생 자신도 스스로를 ‘건달’로 자처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장일순 선생의 이렇듯 드러나지 않게 일하는 방식이 정확히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우리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러한 행동방식 자체는 선생이 되풀이 얘기하였던 ‘생명의 사상’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선생은 “나락 한알 속에 우주가 들어 있는” 이치를 늘 얘기하였고,

모든 생명의 거룩함과 평등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주의를 환기하였다.

그리하여, 선생 자신은 한밤에 풀섶에서 들려오는 벌레소리에도 크게

놀라는 때가 있다고 고백하고, 그것은 그 작은 벌레의 거짓없는 소리가 “내 일상의 생활은 생활이 아니고

경쟁과 투쟁을 도구로 하는 허영의 삶이었음”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생명의 근원적인 신성(神性)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행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어야 마땅한가?

장일순 선생은 노자가 말하는 세 가지 덕목 중의 하나 “세상 사람들 앞에 감히 나서지 않는다(不敢爲天下先)”

라는 구절을 즐겨 인용하였다. 이것은 물론 처세술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

비폭력주의 행동의 원칙을 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목숨붙이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저마다의 타고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려면,

무엇보다 우리 각자가 자기중심적 배타적 권력욕망에서 벗어나 스스로 가난해지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얘기인 것이다. 우리가 장일순 선생을 우리 시대의

큰 스승으로 기억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런 대목에서 분명해진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선생이 살다가 떠난 자리에서 우리가 이렇다 할 큰 흔적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려울지 모른다.

선생은 자신이 그린 많은 서화를 사람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기를 즐겨했으나 글은 거의 쓰지 않았고,

따라서 근대적 지식인 스승들에게서 흔히 보는 기념비적인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선생의 생애는 물론 많은 굴곡이 있었지만, 늘 양(陽)의 방식보다는

음(陰)의 방식으로 일하는 행동 패턴으로 말미암아 이른바 윤곽이 굵은 영웅의 삶이었다고 할 수도 없다.

선생 생전의 진실한 모습은 오히려 선생의

제자나 후배들이 기억하는 작은 일화들 속에서 잘 드러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선생과 함께 지냈던 한 제자의 다음과 같은 증언을 들어 보자.

        

 


이십여 년 전 어느 초겨울 저녁이었습니다. 술 한잔을 걸쳐 약간 취기에 찬

선생님과 나는 좀 쌀쌀한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갑자기 한 곳에 시선을 집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보시는가 했더니 군고구마를 파는 포장마차였습니다.

이 양반이 고구마를 자시려는가 해서 “군고구마 자시겠어요?”라고 여쭈었더니

 “아니, 그게 아니고…” 하시더니 잠시 후 걸음을 멈추고 보고 계신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저기 군고구마라고 쓰인 글을 보게. 초롱불 아래 저 글씨를 보게.

저 글씨를 보면 고구마가 머리에 떠오르고, 손에는 따신 고구마를 쥐고 싶어지고,

가슴에는 따뜻한 사람의 정감이 느껴지지 않나.

결국 어설프게 보이지만 저게 진짜고 내가 쓴 것은 죽어 있는 글씨야.

즉 가짜란 말이야. 그러니까 내 글씨는 장난친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실제로, 우리들에게는 역사적으로 적지 않은 스승들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의 근현대사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었고,

고난 속에서 인간정신은 더 날카로워지는 법이기 때문에,

사상이나 실천을 통해서 비범한 업적을 남긴 겨레의 스승이

적지 않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또한, 강자의 지배 밑에서 오랜 세월 곤욕을 치르면서

살지 않을 수 없었던 처지였으므로 그러한 스승들의 사색과 실천이 무엇보다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부강해지고, 경쟁력을 높여야 할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었음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시대 이래

우리 근현대의 정신사에서 존경받아 온 사상들은 거의 예외없이

부국강병론의 기틀 속에서 전개되어 온 것이 사실이고, 이것은 시대적 맥락 속에서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이 역사적인 필연성을 가진 것이었다고 해서 지금도 유효성을 가진 것인지

우리는 깊이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일찍이 선례가 없었던 엄청난 사회적,

생태적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고, 이것은 비록 외면하고 싶다 하더라도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 되었다. 지금은 한 세기가 가고 다른 세기가 온다던가,

구세대가 물러나고 새세대가 출현한다던가 하는, 역사에서 늘 보아 왔던 단순한

이행기가 아니라는 것은 구구히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모든 징후로 볼 때,

지금은 인간다운 삶의 존엄성은 커녕, 단순한 생존의

지속가능성조차 갈수록 불투명해져 가는 파국 직전의 상황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까지 인류문명,

특히 서구 산업문명의 주류를 떠받쳐 온 자기중심적 힘의 논리가

더 이상 구원의 사상이 될 수 있는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인류사회에 한가닥 희망과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 전역에 걸쳐

생명 중심의 새로운 생태적 세계관이 느린 속도로나마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태적 세계관은 단순히 환경위기를 해소하는 데 필요한 보완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이 파국적인 생태적, 사회적 위기를 초래해 온, 좁게는 산업문명,

넓게는 인류문명사 전체의 기본논리를 가장 근원적으로 돌아볼 것을 요구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이른바 문명사회를 움직여 온 근본 동력이었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경쟁과 대결의 논리,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이원론적 구분과 그것을 기초로 한 권력 지향적

생존양식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 없이는 활로가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기본인식이

오늘의 생태적 세계관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음 세대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금까지

우리 자신을 지배해 왔던 더 크고, 더 빠르고, 더 힘있고, 더 많은 것을 무조건적으로 탐하는

욕망의 구조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장일순 선생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은 요컨대 바로 이러한 의미의 해방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선생이 80년대 초부 터 ‘한살림’의 사상을 이끌어 내고,

제자들과 함께 풀뿌리 민중 속에 호혜적 경제생활조직을 확산시키기 위해

진력한 것은 투쟁과 경쟁이 아니라 협동과 연 대가 새로운 삶과 문화의 기본원칙이라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한 믿음 위에서 선생은 우리에게 개인주의적

자아개념에 갇혀 세상으로부터, 타자로 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열,

고립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던 것이다.

 

 

     해월 최시형과 무위당 장일순의 가르침

그러한 철저한 소박성, 근원적인 겸허함 탓에 오랫동안 우리의 현대사에서 잊혀져 왔던

해월(海月) 최시형 선생의 행적과 사상이 장일순 선생에 의해 새롭게 조명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사실, 우리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의 사상가로서의 해월 선생을

우리들에게 소개한 것만으로도 장일순 선생의 업적은 엄청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세상만물이 먹고 먹히는 순환적인 상호의존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이치를

“하늘이 하늘을 먹고 산다”라는 지극히 시적인 표현으로 드러낸

해월 선생의 ‘이천식천’이라는 개념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비할 수 없이 심오한 종교적 감수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경제성장과 개발의 이름으로 사회적 약자와 자연에 대한 폭력적인

지배가 극에 달한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 무엇보다도 절실한 비폭력주의의

결정(結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해월 선생에서 장일순 선생으로 이어지는

비폭력 사상의 흐름은 한국의 근현대 정신사에서 참으로 희귀한

사상의 맥을 형성하고 있다. 끊임없는 도피와 잠적의 생활 가운데서도 풀뿌리 민중을 하늘처럼 섬기고,

생명의 존귀함과 평등성을 소박한 말과 행동으로 정성을 다하여 가르쳤던 해월 선생의 삶이나

그 삶 속에서 진정한 사표(師表)를 발견한 장일순 선생의 생애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지극히 겸허하고

부드러운 여성적인 영혼이다. 이러한 영혼에 깊이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의 유무에

우리의 구원 가능성이 달려 있을 것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무위당을 기리는 사람들의 홈에서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