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여행/원주--문막

원주 도심지에 자리잡은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었던 원주 감영에 잠시 머물면서

美知 2012. 8. 1. 22:40

 

  [투어토커 제 1 촬영지 원주감영]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와  정문.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 감영은 조선 초기에 설치된 강원감사의 집무처로 건물규모는

70여칸이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 그 뒤 다시 중건하였다.

6·25동란중 큰 피해를 입어 지금은 선화당(宣化堂)과 감영의 문루(門樓)만 남아 있다.

선화당은 임진왜란 후 1667년(현종 8)에 중건된 정면 7칸, 측면 4칸의 겹처마 단층팔작지붕 건물로

평범한 관아건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2층누각건물이다. 밑에는 밖으로 장초석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안쪽의 초석은 높이를 낮추고 두개의 기둥을 세워 판문(板門)을 달았다.

위층은 누마루를 깔아 넓은 다락을 만들고 사면을 개방하였으며, 마루 주위에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돌리었다.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며 네 모서리에만 반자를 설치하였다.

조선시대 감영의 건축형태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인터넷 옮긴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

 

 

 

 

 감영을 돌다보면 커다란 나무가 한그루 보인다.....평소에는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던 한그루의 나무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신비한 모양이 보인다...

                                       남녀의 생식기가 보이는 이런일이~

 

 

 

원주 도심지속에 자리잡은 감영은 도심의 삭막함에 시원한 오아시스 같다 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시내를 쇼핑하다보면 꼭 지나는 이곳 원주감영은 해마다 감영제가 열립니다.

 

http://www.wonju.go.kr 

원주시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원주감영에 대한 좋은 자료를 볼 수있습니다.

 

 

 

 

원주 인물의 전설에 수록중인 임경업 장군의 전설을 올려봅니다.

 

임경업장군의 부친은 원주감영의 옥사장이었다. 그는 비록 말단직에 있었으나 그의성품은

의협심이 강하고 인정이 두터웠다.어느날 살인혐의로 한 청년이 붙잡혀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살인할 것 같지 않은 지극히 선량한 사람이었다. 애끓게 무죄를 주장하는

그의 말을 들어보니 참으로 딱한 사정이었다. 그대로 두면 살인자로 사형을 받을 사 람이므로 한 계책을 일러주어

그를 도망가게 했다. 그후 임장군의 아버지는 옥사장을 그만두고 고향인 손우 리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살았다.


어느날 중이 찾아와서 시주를 청하였다. 얼마만큼의 곡식을 주니 그 스님은

"이 집이 임옥사장 집이 아니오?" 하고 물었다. 임장군의 아버지가
"그렇소 그런데 왜 그러시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스님은 "나를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하며 고깔을 벗는 것이었다. 아무리 살펴 보아도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삭발에 법의를 걸친 스님의 모습에서는 아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럴만도 하시리이다 소승은 십년전 원주 감영에 살인혐의로 붙들려 갔던 사람이올시다.

그때 옥사장님께서 살려주시지 않았다면 영낙없이 죽음을 면치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깊으신 인정으로 무리해서 제가 살아날 기회를 마련해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나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소승은 그간 뜻한바 있어 삭발을 하고 입산하여 수도에 힘썼으며
이미 부처님의 덕을 입어 명산 대찰의 자리를 잡아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승이 옛날 저를 살려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묘자리나 하나 잡아드려 훌륭한 자손이나 보시게 하여 드리고 싶습니다" 고 말했다.
이리하여 그 스님은 지금 평촌마을 건너편 산기슭에 그의 조부의 묘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후 태어난 아이가 임경업이다. 그가 비명에 죽어가게 된것도 묘자리를

잡아준 스님의 주의사항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 스님은 묘자리를 정하고 나서 "만약 상을 당하면 삼일장으로 하여 장사날에 청광하여 광을

짓고 거적을 씌울것이며 그때는 반드시 상주 혼자서 광을 지키다 광속에서 혹시 어떤 소리가 들리거나

괴이한 일이 일어나도 들여다보거나 그 자리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 뒤 부친상을 당한 임장군의 아버지는 부친이 돌아가시자 스님의 말대로 광을 짓고 그 위에

거적을 씌우고 밤샘을 시작했다.

자정이 되었을 무렵 적막하기만 하던 광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고 나중에는 쨍그렁거리는 쇠소리마저 들렸다.

임장군의 부친은 무의식중에 거적 한귀퉁이를 쳐들고 광속을 들여다보다가 스님의 말이 생각나서 거적을 덮었다.

임장군의 아버지자 목격한 광속의 광경은 괴이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두 사나이가 칼을 휘두르며 겨루는 순간이었다. 임장군의 아버지가 거적을 들추는

순간 한 사나이와는 눈이 마주쳤다.임장군의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사나이가 곁눈을 파는 순간 다른 사나이의 칼에

맞아 아깝게도 무참이 쓰러져 죽는 것이었다.


임장군의 아버지는 이와 같은 두 사나이의 싸움이 무엇을 뜻하는것일까 하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채

스님이 정해준 묘자리에 묘를 썼다. 그리고 삼우제를 올리려고 묘에 이른즉 누구의 짓 인지 관이 묘밖으로 튕겨져 나와있었다.

는 다시 관을 묻고 그날밤은 누구의 짓인지 알아보기 위해 무덤곁에서 지키기로 했다.

한밤중이 되어서였다. 세사람의 무사가 나타나더니 임장군의 아버지를 보고 꾸짖었다.
"당신같은 사람은 이 명당에는 묘를 모실수 없오. 이 자리는 따로 임자가 있는데 왜 여기다 묘를 썻소"
하고 나무라는 것이었다. 임장군의 아버지는 그들앞에 비는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여기에 부친을 모시게 되기까지는 제나름대로 까닭이 있어서 그렇소.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중의 한사람이 "이왕 이리 되었으니 할수 없소"하고는
"그럼 김공의 자리는 저편으로 정합시다"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김공이라 이르는 사람이 김자림의 손에 의해 참살당한 것은 이미 이때에

맺어진 인연 때문이었다 한다.

새로 태어난 임씨집안의 경업은 어려서부터 하는짓이 달랐다. 언제나 전쟁놀이가 아니면 힘겨루기를 했고

힘을 겨루면 항상 이겨서 두각을 나타냈다. 전쟁놀이를 할 때 군율을 어기었다고 해서

낫으로 어린 부하를 찍어 그것이 문제가 되어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충주의 달천으로 이사를 하게 된것도 소년 임경업의 심한 장난때문이라고 한다.

 

전쟁놀이를 하는 소년 임경업이 진지라 해서 원님의
행차를 못지나가게 했을때도 있었다. "여기는 전쟁터요, 이 새 끼 줄 친곳은 우리의 성이니 누구도 못지나가오.

만약 지금 지나가면 목을 베겠소" 이 깜찍한 소년의 눈은 유독 반짝이었다. 원은 후일 그가 크게 될 인물임을 알고 도리어 너그럽게 "대단한 소년이군 그래"하고 할수 없이 밭둑길로 행차를 하게 했다 한다.

1616년 광해 10년에 무과에 급제한 임경업은 문헌에 의하면 충주 달천태생으로 되어 있으나 그것은 6세때에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그의 출생은 원성군(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