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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당일치기여행 원주 가볼만한곳 거돈사지 법천사지 흥원창

美知 2016. 12. 5. 21:04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18 사적 제168호

 

사적 제168호. 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나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고려 초기에 대찰의 면모를 이룩하였다.

약 7,500여 평의 절터에 있는 금당지(金堂址)에는 전면 6줄, 측면 5줄의 초석(礎石)이 보존되어 있어 본래는

20여 칸의 대법당이 있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금당지 중앙에는 높이 약 2m의 화강석 불좌대(佛坐臺)가 있고, 금당지 앞에는 보물 제750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다.

또, 절터에 있는 민가의 우물가에는 탑 옆에서 옮겨왔다는 배례석(拜禮石)이 놓여 있는데 그 크기는 135×85㎝이며,

전면과 측면에 안상(眼象)을 조각하였고 상부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3층 석탑으로부터 북쪽 약 50m 지점에는 보물 제78호로 지정된 원공국사승묘탑비가 있다.

비문은 해동공자(海東孔子) 최충(崔冲)이 지었고 글씨는 김거웅(金巨雄)이 썼으며, 1025년(현종 16) 건립되었다.

이 비석 서쪽 60m 지점에는 원공국사승묘탑이 있었으나, 민족항일기에 서울에 사는 일본인의 집으로 옮겼던 것을

1948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서 보관하고 있다.

 

 

거돈사지3층석은 2중 기단 위에 3층탑을 세웠으며, 전형적인 신라 3층석탑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사각의 돌로 된 축대 안에 흙을 쌓고 그 위에 탑을 세운 점이 특이하다.탑이 땅과 닿는 부분인 지대석은

4개의 크고 긴 돌로 만들었고, 그 위의 기단부는 위 아래층 모두 모서리기둥 2개와 버팀기둥 1개를 새겨 놓았다.

탑의 몸돌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이 모서리기둥만 새겨 놓았다. 각 층 처마의 받침은 5단으로 꺾여 있으며,

탑의 추녀 끝은 약각 치켜들려 있어 날렵함을 보여 준다. 추녀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보인다.

 

 

 

부도는 고려시대 부도의 정형으로서 보물 제190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절터에서 약 30m 아래에는 높이

9.6m의 거대한 미완성품 당간지주가 있는데 돌을 운반하던 남매 장사 중 남동생이 죽게 되자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하며,

남동생이 옮겨오다가 둔 하나의 지주는 지금도 현계산 동남쪽에 있다고 한다.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원주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비

 

귀부의 거북머리가 용머리처럼 변화하였는데 양쪽 귀 뒤가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되어 있다.

귀갑문 안에는 사자와 연꽃무늬가 교대로 장식되어 있다. 비 머리인 이수에는 구름 위에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싸인

보주를 다투어 물고자 하는 모습을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높이가 499.7cm, 비신의 폭은 123.8cm이며 고려 초

조각예술의 높은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국보 제 59호

 

 

법천사터에 세워져 있는 지광국사(984∼1067)의 탑비로, 국사가 고려 문종 24년(1070)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지광국사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놓았다. 지광국사탑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탑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길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부드러운 필체로 썼다.

 

 

 

소양강창(昭陽江倉)·가흥창(可興倉)과 함께 좌수참(左水站)에 소속되어 인근 고을의 세곡(稅穀)을 운송하였다.

좌수참에는 51척의 참선(站船)이 배치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의 흥원창(興元倉)을 계승하여 운영하였다. 원주·평창·영월·정선·횡성 등 강원도 영서지방 남부 5개

고을의 세곡과 강릉·삼척·울진·평해 등 영동지방 남부 4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 보관하였다가 일정한 기일 안에 경창(京倉 :

서울에 있는 조창)으로 운송하였다.

 

 

그 뒤 1413년(태종 13) 영동지방의 세곡을 주창(主倉 : 그 지역의 세곡을 모두 한 곳으로 모으는 조창)에

남겨두고 군사용의 물자로 사용하게 하면서 영서지방의 세곡만 운송하였다.

그 운송항로는 한강의 수로를 따라 서울의 용산강변에 이르는 것이었다.

 

 

소양강창과 마찬가지로 그 기능이 크지 않아서 조선 후기에 관선조운(官船漕運)이 쇠퇴하고

사선업자(私船業者)에 의한 임운(賃運 : 운임을 받고 운반하던 제도)이 널리 행하여지면서 관할 각 고을의 세곡도

임운됨으로써 이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흥원창에서 만난 아름다운 일몰은 하루를 잘 마무리한 내게 토닥토닥 수고했다고 위로해주는듯 정겨움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