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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산수유꽃축제 열릴즈음 구례여행 구례산수유꽃축제가 열리는 구례 운조루에서나눔과베품의 10대정신을배우고,전통가옥 한옥펜션 곡전재를 가보

美知 2015. 3. 17. 16:10



중요민속자료 제8호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 10대정신


1. 나눔과 베품의 積善精神 ㅡ 他人能解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행랑채에 백미 두가마니반이 들어가는 목독[쌀독]에 쌀을 담아놓고 끼니를

끓일 수 없는 사람이 쌀을 빼다가 끼니를 해결 할 수 있게 하였음. 그 마개에 타인능해라고 써놓았는데

누구나 마음대로 쌀독의 마개를 열 수 있다는 뜻임. 

 

2. 분수에 맞는 生活精神 ㅡ 隨分室
아들이 기거하는 누마루에 수분실 이라는 현판을 걸고 세상을 살아갈 때 항상 자신의 분수에

맞는 생활 태도를 갖도록 하였음.

3. 風流의 精神 ㅡ 時調 萬餘篇
조선조말 한일합방에 반대하고 자살을 했던 매천 황현 같은 시인 묵객들과 더불어 문우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시를 읊으면서 대대로 써온 시조가 일 만 여 편에 달함.

4. 人間尊重의 精神ㅡ 할머니 사랑방
남존여비의 유교적 사상이 팽배했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안 사랑채를 동편에 건축 하였으나 현재는 소실되어 복원이 요청됨.

5. 記錄을 남기는 精神ㅡ 百年동안의 日記
3대에 걸쳐 농가 일기와 생활 일기를 백 년 동안 기록하고 사회조직문서와 지세분정기를 자세히

기록하여 당시의 생활상을 한눈에 파악 할 수 있게 하였음.

 

 

6. 善政을 베푸는 精神 ㅡ 樂安郡守
낙안 군수로 재직 할 당시에 백성을 잘 보살피고 청빈하게 군수의 직무를 수행하고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고

부임지로 행차할 때 모든 군민이 길거리에 나와 엎드려 울며 못 가게 붙들었다고 함.

그 당시에 공적비가 있었다하나 지금은 찾을 수가 없음.

7. 建築을 사랑한 精神 ㅡ 水原華城
수원 유수로 재직하면서 수원성을 쌓을 때에 정조의 마음 에 흡족할 정도로 축성을 잘 하였다고 함.

당시에 신하들이 성을 튼튼하게 쌓으면 되지 왜 이렇게 아름답게 쌓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정조는 [아름다움이 능히 적을 이길 수 있느니라] 하고 대답 하였다고 함.

필자의 7대조는 축성의 공로를 인정받아 2계급 특진을 하였음.

 

8. 節槪를 굽히지 않은 선비 精神ㅡ 創氏改名反對
일본의 조선조 문화 말살 정책의 일환이었던 성씨 개명을 끝까지 반대하고 선비로서의 절개를 굳건히 지킴.

9.父母와 祖上에 대한 孝道精神-제사지내는 일과 무덤 돌보는 일
일기의 내용을 보면 조상을 섬기고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는 내용이 거의 대 부분인 점을
보면 대대로 효도를 다하였음을 알 수 있음.

 

10. 兼愛의 精神ㅡ 굴뚝을 낮게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여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게 함.
[柳 應敎 ㅡ 전북대 명예교수 공박. 시인. 柳 爾胄의 8세손임]..옮긴글

 

 

운조루의 전해오는 이야기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는1776년(조선 영조 52년)에 건축한 건물로 중요민속자료 8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조루는 경상북도 안동태생으로 낙안군수를 비롯하여 주요 지방 수령과 대규모 국가 건축의 책임자를 지낸

유이주라는 사람이 건축적 기본소양과 재력을 받침으로 창건한 것으로 금환락지(천정 에서 옥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형상)의 명당에 99칸의 집을 짓고 그 일가들을 모여 살게 한 곳이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ꡒ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ꡓ이라는 뜻과 ꡒ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ꡓ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는데 ꡒ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ꡓ에서

첫머리인 운(雲)과 조(鳥)를 따온 것이다. 한편 운조루 창건 과정에서 운조루가 명당의

증거라는 사건이 발생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집터를 잡고 주춧돌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도중 부엌자리에서

어린아이의 머리크기 만한 돌거북이 출도 되었는데 이는 운조루의 터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금귀몰니(金龜沒泥)의 명당을 입증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 돌거북은 운조루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다 지난 1989년 도난당했다.

운조루가 아직까지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명당중의 명당에 집을 지었다는 것도 있지만 이 저택이

조선후기 건축 양식을 충실하게 따른 역사적 유물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이주에 의해 창건된 운조루는 7년간의 대공사를 거쳐 완공될 만큼 규모가 대단하였는데 조선시대 대군들이 집을

지을 수 있는 69칸을 넘어 99칸의 규모였다. 일부에서는 운조루 창건 당시에는 1백칸을 족히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200여년의 새월이 흐르면서 일부가 노후되는 오늘날에는 60여칸만이 전해진다

 

운조루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 (한국문화답사회 인용)
구례구에서 경남 하동포구로 흘러가는 섬진강을 따라 난 19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 보면 토지면 오미리에서

넓은 들을 만난다. 멀리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의 한 기운이 소백산맥이 지리산 왕시루봉을 빚고 그 산 줄기가

흘러와서 섬진강을 만나는 강가에 만들어 놓은 '구만들'이다.

 

토지면의 토지(土旨)라는 이름은 원래 금가락지를 토해 냈따는 뜻의 토지(土指)였다고 한다. 옛날에 가락지는

여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는 정표로서 성행위를 하거나 출산할 때만 빼는 것이다. 여기서 가락지를 빼놓았다는 것은

곧바로 생산을 뜻한다. 그래서 토지면 오미리 일대는 금환락지, 곧 풍요와 부귀,

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명당이라 알려져 왔다.

 

이처럼 좋은 터이니 혹자는 이곳을 청학동으로 여기기도 했으며,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난세를 피해 찾아가는 사람이 많았는데,

일제 강점기인 1918년에 70가구 350명이던 인구가 1922년에는 148호 744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운조루(雲鳥樓)는 토지면 오미리 명당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가옥으로 1776년 무관 유이주(1726~1797)가

지은 가옥의 사랑채인데, 지금은 가옥 전체를 운조루라 부르고 있다.

 

유이주는 어려서 문경새재를 넘다 호랑이를 만나자 채칙으로 호랑이의 얼굴을 내리쳐 쫓아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힘이 세고 기개가 뛰어났던 인물이다. 당시 마을사람들도 운조루의 터가 길지인 줄은 알고

있었으나 바위가 험하여 집을 지을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타인능해]

"타인능해" 란 쌀 두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나무독에 쌀을 채워놓고 마을에 가난한 사람이 끼니를

이을 수없을때 마개를 돌려 쌀을 빼다가 밥을 짓도록 허용한다는 뜻으로 쌀독의 마개에 "타인능해"

라고 써놓았다.각종 민란,동학, 여순사건, 6.25전쟁 등 힘든 역사의 시간을 지내오면서도

운조루가 지금처럼 건재 할 수있었던 것은 어쩌면 바로 이 타인능해의 정신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유이주가 전라도 승주(지금의 순천)에서 낙안군수로 재직하여 있을 때 "하늘이 이 땅을 나를 아껴 나를 기다리신 것"

이라고 하며 수백명의 장정을 동원해 집터를 닦았다고 한다. 한편 오미리에는 금환락지와 더불어

금구몰니(金龜沒泥)와 오보교취(五寶交聚)형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왔다.

 

 

오미리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들 세 명당은 오미리 구만들에서 상,중,사대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운조루가 상대인 금구몰니 명당이고, 행랑채 밖 못자리가 중대 금환락지, 면소재지에 있는 유부사가 세웠다는

돌탑자리가 하대 오보교취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운조루가 금구몰니의 명당에 해당한다고 하는 항간의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유이주가 집터를 잡을 때 땅속에서 어린애 머리 크기만한 돌거북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집을 앉힐 때 돌거북이 나온 자리에 부엌을 둔 것이다.

운조루가 명당터라 하여 손꼽히지만, 기실 눈여겨보아지는 것은 운조루의 건축구성이다.

운조루의 옛모습은 그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전라구례오미동가도'에서 살펴 볼수 있다.

 

 

마당에서 높은 사랑채를 서쳐 안채로 통하는 길목은 수례가 올라가거나 짐을 지고 다닐 때 편리하도록

오르막길로 만들어져 있으며, 사랑채의 막돌 기단에 만든 계단과 비교되어 색다르다.

내원과 외원이라 하여 사랑채의 마당과 대문 밖의 입구쪽에 정원을 퍽 잘 꾸몄다고 하는데,

지금은 손길이 미치지 못하여 형편이 말이 아니다.

구례여행 꼭가볼만한곳 운조루

영원한사랑을찾아서 구례산수유꽃축제가 열리는 구례여행 꼭가볼만한곳 운조루

안채로 들어서면 네모 반듯한 마당 아랫쪽에 장독대가 있고, 거북을 닮은 맷돌이 있다.

큰 부엌자리에서 나왔다는 돌거북은 집안의 가보로서 대물림을 하고 있으나, 1987년 도둑맞아 이제 볼수 없다.

건축물 구조와 이들 가문이 소장한 여러 문서, 서화 문구 등을 통해 조선후기 호남지방 양반가의 생활상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운조루는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으나, 보수나 관리가 소홀해 해가 다르게 쓸쓸해 지고 있다.

[옮긴글]

 

운조루또다른이야기 평면구조를 살펴보면 사랑방 서쪽에 대청 2칸이 있는데 이것이 "운조루"이다.

"운조루'는 일종의 택호에 해당하는데,"구름속에 새처럼 숨어사는집"이란 뜻이다.

운조루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라는 칠어율시의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옮긴글]

 

현재 운조루에는 외형은 그대로 두고 실내는 양식시설을 해두어 주민이 살고 있다고 한다.

영원한사랑을찾아서 구례산수유곷축제가 열리는 구례여행 운조루

남도 이순신길...백의 종군로

이순신의 백의종군은 조선의 운명을 새롭게 바꾸고 7년 한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순신장군은 410년전 1597년 4월1일 도원수 권을 밑에서 백의 종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백의종군길을 나서

천안,공주,논산,익산,삼례,임실,남원,구례,순천을 거쳐 4월27일 긴박하고 고단한 여정에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상태로

도원수가 있는 순천부에 당도하였다.27일간의 백의종군길 중 구례현 백의종군길은 이순신장군의

호남에 대한 인식이 깊게 나타나있다.구례백성과 현감의 따뜻한 배려는 그에게 재기의 신념을

실어주었고 다시한번 애민의 마음으로 어려운현실을 극복하고 확고한 신념을 다지게 한 길이었다.

 

 

구례군 향토문화유산 제9호 곡전재 (조선후기 전통한옥)

영원한사랑을찾아서 전남구례 산수유꽃축제가 열리는 구례여행 운조루와 한옥펜션이 있는

한옥펜션 곡전재 홈페이지 http://www.gokjeonjae.com/

이곳은 기존의 땅소유주에게만 펜션업을 할수있도록 허용이된 곳이라고 한다.

 

 

구례여행 꼭 가볼만한곳 구례운조루에서 나눔과 베품이 무엇인지

다시한번 깨닫게 된 좋은 경험을 하고 돌아온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