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차바나(茶花)의 유행 : 16c 후반에 차를 드는 다석(茶席)에 꽃이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릿카(立花)는 대서원(大書院)의 마루방에 장식되는 것으로서 호화롭고 장식적인 색채가 농후했으므로 간소한 다실의 분위기에는 맞지 않았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형태로 꽃병에 꽃을 꽂는 나게이레(投入 : 병꽃꽂이 )에 의한 다실의 꽃꽂이가 나타났다. 이러한 챠바나는 에도시대에 이르러 한층 번성하였고 간소한 꽃꽂이는 후일의 세이카(生花)로 이어지고 있다.
3) 세이카(生花)의 발전과 양식 : 18c 중엽, 릿카(生花)를 간소화한 양식이 나게이레바나(投入花)의 자연스로운 형태를 받아들여, 세이카(生花)를 낳았고, 19c 초에 천지인(天, 地 ,人) 이라고 하는 3각법의 양식을 갖추면서 조화된 대자연을 표현하는 꽃꽂이가 널리 성행되었다. 세이카(生花)는 정형적 삼각형의 구성을 취하는 것과 줄기를 하나의 선으로 하는 점에 그 특색이 있으며 어느 것이나 자연미의 발휘에 역점을 두고, 화기에 대해 측면체를 만들어 꽃모습에 음과 양의 구별이 있다.
4) 세이카(生花)와 나게이레바나(投入花)보급 : 메이지 유신에 의한 서양문화의 유입으로 일본문화는 크게 변했고, 꽃꽂이 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이카 유파의 사람들은 바쿠후하의 무사계급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무사계급의 몰락과 함께 그들의 꽃꽂이도 쇠퇴하였다. 이에 반해 문인풍(文人風)의 꽃꽂이가 정부고관을 중심으로 탄생되었는데, 그후 이것은 모리바나(盛り花 : 수반 꽃꽂이)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승려와 무사 즉 남성 전유물이었던 꽃꽂이가 이후부터 여성들이 즐기는 구(具)라는 형태로 되었으며 쇠퇴하던 세이카가 부흥하여 오늘에 이른다.
5) 자유화(自由花)의 양식 : 분재(盆栽)에서 힌트를 얻어 모리바나(盛り花 :수반꽃꽂이)가 발달하였다. 모리바나, 나게이레바나 (投入花)의 합리적인 교수방법이 실내장식으로 받아 들여지고, 그것이 세이카에 대항하여 크게 번성하였고, 거기에서 자유화가 파생되었다. 자유화는 1920년대에 모리바나가 한층 더 발전한 양식으로 이것은 색채 본위라는 점에서 모리바나, 나게이레바나와 다른점은 없으나, 문인풍이 지니는 자유로운 움직임이 첨가되어 있어 다소 그 감각이 다르다.
6) 전위화(前衛花)의 출발 : 1930년 이데올로기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과거의 관념이나, 화형(花型)의 부정을 선언했다. 전후, 전위적 꽃꽂이는 전통적 꽃꽂이 및 모리바나(盛花), 나게이레바나(投入花)를 고수하는 꽃꽂이계와 어깨를 겨루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실외에까지 진출, 무대 장치로 발전하면서 꽃꽂이 의 새로운 면모와 이념, 존재 방향에 새로운 문제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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